산으로가는길/베트남,캄보디아 여행

베트남,캄보디아 여행 (톤레삽호수 )12

청계수 2016. 2. 5. 22:05

 

저스트 고(Just go) 관광지

톤레사프 호수

[ Tonle Sap Lake ]

똔레사프호수

똔레사프호수

분류 해외여행 > 관광지
지역 아시아 > 캄보디아 > 시엠립
유형 자연물(산지)
휴관일 연중무휴
가는방법 시내에서 자동차로 30분

캄보디아 중앙에 위치한 톤레사프 호수는 캄보디아 사람들에게는 젖줄과 같은 호수다. 길이 160km, 너비 36km로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큰 호수다. 우기에는 메콩강에서 역류한 물이 흘러들어 호수의 수량이 건기에 비해 3배 정도 늘어나 풍부한 어업 자원을 제공한다. 메콩강의 황토가 같이 실려와 물색이 탁한 황토색을 띠는 것이 특징이다. 해질 무렵 호수가 황금색으로 물들어 장관을 연출한다. 보트를 빌려 호수를 둘러볼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톤레사프 호수 [Tonle Sap Lake] (저스트고(Just go) 관광지, 시공사)

 

 

수상가옥을 관광하고 강을 거슬러 올라와 선착장에 도착 한다

 

 

 

선착장에 도착 한 아버지와 딸

아들은 어느새 배 앞으로 나가 우리 일행이 내리기 편하게 배를 안전하게 붙들어 매고 있다

 

 

선착장에 내려 강둑을 오르고 있다

 

 

 

이곳에도 어제 보았던 지뢰 피해자들이 모여서 우리 음악을 연주 하고 있다

우리가 가는 관광코스를 미리 알고 움직이는 것 같다

 

 

 

 

 

 

 

 끝없이 펼쳐진 대지에 외곽 도로는 포장이 되어있지 않아 황토 먼지가 폴폴 날린다

 

 

 

 

 

 

 

 

버스를 타고 이동 하여 점심 먹으러 온 식당앞

우리집 화분에 키우고 있는 꽃나무 가 여기는 날씨가 더우니 활짝 피어나 있다

 

 

 

 

 

 

 

 

 

 

 

점심 식사 후

크메르 루즈 군이 잔인한 학살을 한 킬링필드 로 찿았다

 

 

 

전국에 산재해 있는 유골을 지역별로 모아 놓았다고 함

 

 

 

 

 

 

 

 

 

 

 

 

 

 

 

 

 

 

 

유골을 모아 놓은 탑

 

국민 200여만명 학살한 ‘킬링필드’ 폴포트 사망

200여만 명을 학살한 캄보디아의 전 크메르 루주 지도자 폴 포트(73살·사진)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크메르 루주 본부와 태국 군부가 16일 밝혔다.
폴 포트는 젊은 시절 프랑스 유학 중 마르크스주의에 빠졌으며 귀국 후 공산주의 정권 수립을 위해 무장 투쟁을 벌였다. 크메르 루주가 정권을 장악한 3년 8개월 동안 캄보디아 국민의 25%에 해당하는 200여만 명이 참혹하게 학살됐다. 이같은 만행을 그린 영화 ‘킬링필드(죽음의 들판)’는 세계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옮겨온글)

 

 

 

 

 

무차별 살해한 대상은 남녀 노소 가리질 않고 살상을 저질렀다고 함

외국어하는사람, 잘 사는 사람 ,교수, 교사

 

안경을 썼다고 죽이고

외국어를 안다고 죽이고

피아노를 치고 기타를 칠 줄 안다고 죽이고

손이 부드럽다고 죽이고

학생이 있는 가족이라고 죽이고

키가 크다고 죽이고, 뚱뚱하다고 죽이고

이런저런 이유로 200만명 이상이 죽었다.

 



◇ 공산화의 참극

 

캄보디아는 <킬링 필드>라는 영화로 이미 그들의 비극이 널리 알려져 있다. 1975년~1979년 사이에 캄보디아를 강타했던 공산혁명은 대략적으로 2백만명 이상의 무고한 양민을 학살한 인류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대 비극의 역사였다. 폴포트 정권 공산치하에서 캄보디아 전체인구의 1/3이 희생되었다. 이 비극의 역사가 태동하게 되는 과정을 간략하게 요약하여 본다.


◇ 킬링필드(Killing Field)의 현장

 

우리는 캄보디아를 방문하게 되면 불과 20년 전의 생생한 현장을 방문하게 된다. 그중 하나가 지금 언급하고있는 킬링필드의 현장이고. 또 한곳은 뚜올 슬랭(Tuol Sleng) 심문센터이다. 프놈펜 관광의 스타트는 뚜올 슬랭(Tuol Sleng)박물관으로 부터 시작한다.


뚜올 슬랭 심문센터는 프놈펜 시내에 고등학교 건물을 개조하여 심문실, 고문실, 유치실로 만들어 혁명 정권의 악명 높은 숙청의 산실로 이용 되었다. 이 센터는 직원이 1백 여명이나 되었는데, 타자수, 사서, 사진사, 전기기사, 대필사, 전직교사, 심문관 등으로 구성되어 혁명 정부의 충직한 집행자로 활약 하였다.


심문관 들은 대체로 교육을 받지 않은 어린 농부로 전투요원으로 맹위를 떨쳤던 혁명군의 첨병 들이었다. 이들의 나이는 12세~16세로 사람들을 죽인다는 행위 자체를 나쁜 것인지도 모르고, 오히려 잔학한 행위를 하는 것이 지도부에 충성하는 것으로 인식 하고 있었다. 이곳에 가면 이들의 일부 사진이 전시되어 있으며, 일부지만 여자 대원도 눈에 들어온다. 가슴에 번호표를 단 사진을 찍는 등 기록을 남긴 다음 살해하는 것을 보면 크메르루즈군들은 죄책감은 커녕 오히려 나름대로 합리성을 가지고 있었다.


1975년 이곳은 원래 고등학교였지만 킬링필드의 주역 ‘폴포트’가 형무소로 개조한후 s-21로 불리면서 17,000명의 인원을 수용했었다고 한다. 1979년 베트남군이 이곳을 점령했을때 이곳에는 단지 7명만이 생존해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폴포트동상 건립을 위해서 죽이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는 그들이 죽인 사람들을 수용했던 고등학교 건물을 가보았다. 입장료 2불내고 들어가니 고문기구와 수천 명의 사망자 사진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복수를 우려한 폴포트는 그 가족과 친척까지 전부 학살했기 때문에 아기와 어린아이의 모습도 많이 보인다. 끝없는 사진들 하나같이 공포에 질린 얼굴들. 한마디로 끔찍하다. 캄보디아인뿐만 아니라 미처 탈출하지 못한 서방기자들의 모습도 보인다. 물론 그들도 예외없이 학살당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것은 학살된 유해의 해골로 캄보디아지도를 만들어 놓았는데 뭐라 설명할수 없는 독특한 기분이 든다. 무서운것도 아니고 놀라운것도 아니고 특별히 할 말이 없다. 그당시 캄보디아에 태어나지 않은걸 감사했다. 이곳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귀신 소동이 많이 일어난다고 한다. 가끔 귀신이 나타났다는 신문 기사가 나기도 한다고 한다.


킬링필드는 두얼슬랭에서 죽은 사람들이 묻히는 곳이다. 킬링필드 현장은 프놈펜에서 약20km 떨어져 있으며, 가는 도중에 돌아올 수 없는 다리, 유해들이 발굴된 구덩이 10여개, 그 유해들을 모신탑 등 그 당시의 생생한 현장들이 눈에 보인다.


원래 과수원땅이었는데 개발도중 시체가 발견되어 발굴된 죽음의 땅이었다. 줄맞추어 묻힌것이 아니라 마구잡이로 묻히었기 때문에 삭막하기 그지없다. 가로 세로 3미터 정도 되는 구덩이. 높이는 1.5미터 정도 되는데 그 안에 많게는 200구 정도의 시체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구덩이와 구덩이 사이에 사람이 다닐 수 있게끔 되어있는데 거기에는 당시에 사람들이 입었던 옷가지와 뼈가 다 썩지않아서 나풀거리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보고 나면 잠이 오지 않는다. 그리고 중앙에는 해골탑이 있는데 1층2층 층계로 되어 있어서 그곳에 해골들이 놓여있고 맨 밑 칸에는 옷가지들이  쌓여 있다. 정말 처참하다.


킬링필드 현장은 프놈펜의 형무소에 수감된 사람들을 이곳에 옮겨와 처형한 곳인데 총알을 아끼려고 생매장, 죽창등 갖은 만행을 저지르며 학살을 했다고 한다. 부모가 보는 앞에서 아이를 사격연습용 표적으로 사용했다고 하니 할말이없다. 사람이 어디까지 잔인해 질수 있는걸까?


역사의 현장에 도착하면 그 당시 희생된 사람들의 명복을 빌기위해 위령탑이 세워져 있는데 탑 내부에는 해골과 그 당시에 입었던 옷 가지 등의 유품들이 전시 되어있고, 주위를 둘러 보면 발굴 당시의 사진들과 수 십 개의 구덩이가 파헤쳐져 있다.


이곳에서는 탈주 시도가 여러번 있었으나 거의 실패로 돌아가고 그 중 한명이 탈주하여 그 간에 일어난 모든 사건들을 외국 기자에게 소상히 알리어 캄보디아의 잔혹 행위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진술에 의거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킬링필드>라는 영화가 제작되어 세계인을 경악 시켰다.


여기에서 약 30만의 사람들이 처형 되었으며, 이곳 말고도 캄보디아 전역에 수 곳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공산혁명 지도부의 숙청작업

 

엄청난 민족 대 학살의 신호탄은 자기들간의 의견 조율 실패에서 일어 났다. 1976년 9월 소집된 공산당 중앙위원 회의에서의 캄보디아 공산당 창설기념일에 대한 이견에서 시작되었다.


첫번째 의견은 폴포트 자신이 1960년 서열 2위로 캄보디아 노동당 KWP을 창설 했을 때를 희망 했으나, 또 다른 의견은 1951년 베트맹 공산당의 지배적인 영향하에 창설된 크메르 인민 혁명당 KPRP을 창설 일로 하자는 주장이 제기 되었다.


이에 노한 폴포트는 1951년 안에 동조했던 두 명의 고위 간부 케오 미아스(Keo Meas)와 논 수온(Non Suon)이 당 지도부를 배반 하였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혁명정권의 악명높은 심문센타 뚜올 슬랭으로 끌려가 처형 되었다.


폴포트는 두 명의 고위 당 간부를 숙청한 이후부터 미세균이 침투하여 당이 병들었다면서 악덕 세균 색출을 지시했다. 악덕 세균으로 간주되는 자들은 혁명에 반대하는 사람들, 당내 반 혁명분자, 전 정권의 관리와 군인들, 전직 교수 및 교사, 지식인, 의사와 약사, 중산층 등이 목표가 되었다. 그리고 베트맹이 주도할 때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했던 당원들, 그리고 베트남 국경지대인 동부지역에 연관된 관리나 그 지역 사령관이나 군인들등이 숙청되었고, 그리고 중국의 ‘문화혁명’에 자극을 받은 폴포트가 공무원, 교사, 영어를 하는자, 교육을 받은적이 있는 학생, 안경을 쓴 사람, 손에 못이 안 박힌 사람, 외국서적을 가진 사람, 양담배를 피웠던 사람 등은 부르주아로 분류되어 처형하였으며, 국내에 있던 외국인들과 월남인들도 간첩의 협의로 모두 처형되었다.


이 심문센터에 끌려온 사람은 거의 무고한 사람이었다. 심문을 받은 사람은 다른 3명의 이름을 자술서에 적었고, 또 들어오는 사람은 다시 3명을 불러야 했고 심문 받은 모든 사람은 반 혁명의 죄를 뒤집어 쓰고 처형 되었다.


당시 이 심문센터 한 곳에서 약 2만 명이 처형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심문센터 근처에 있는 노동자들은 이곳은 ‘들어가지만 나오지는 못 하는 곳’이라고 이야기 하고있다. 이곳에 들어가 살아남은 사람은 약 10여명으로 추정될 뿐이다.


◇ 도시민의 추방과 4년계획

 

크메르 루즈 공산 게릴라의 프놈펜 입성으로 내전은 끝나고 도시민들은 새로운 점령군의 활동에 큰 기대를 걸어 평온한 가운데 기쁨에 들떠 있었다. 베트남 스타일의 군복에 근엄하면서도 진지한 그들의 모습에 프놈펜 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들은 환영으로 그들을 맞아 주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15세 이하의 어린 소년들이었다.


그러나 그 환희도 잠시, 도시민들은 그날 오후부터 혁명군이 짜놓은 각본대로 농경지대와 시골지역으로 추방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2개월간 전국적으로 2~3백만 명의 인구가 농부로 신분이 바뀌어 시골지역으로 이동되었다. 그들의 긴 이동행군은 정말 힘들었고 이동 중 노약자와 환자 그리고 어린이들은 말라리아와 풍토병에 시달리기도 하고 죽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냉정하게도 대열에서 이탈한 사람들에게는 짐승보다도 더 차갑게 대했다. 추방길을 인솔한 부대원은 대부분 시아누크 정부와 논놀 정권시대의 가난한 하층민들로 1970~1975년 사이에 캄보디아 공산당에 가입하여 무산계급의 혁명을 교육 받으며 착취계급에 대한 증오를 키웠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도시민 추방 정책은 프놈펜 점령 수 개월 전에 당지도부에 의하여 결정 되었는데, 그 배후엔 몇 가지의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


첫째, 당시 프놈펜의 인구는 각 지방에서 몰려든 피난민으로 2백만이 넘어 식량이 절대 부족 하였고 , 혁명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중산층 이상 도시민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가 없었다. 둘째, 혁명 지도부 인사들의 안정성이 고려되었다. 이들은 오랫동안 지하활동과 산악생활에 익숙 하면서 노출된 도시 생활을 불안해 하였다. 셋째, 혁명 지도부가 도시를 반 혁명의 토양과 혁명의 장애물로 인식 하면서 반 혁명의 온상을 갈아 업고 혁명정권의 기반을 다지려 했던 것이다.


4개년 계획은 원래 모든 분야에서 사회주의를 건설 하기위한 계획이었다. 이 계획에 의하면 모든 캄보디아의 농토를 집단 농장화 하여 농업 생산량을 증대 시키고 잉여 생산물을 수출하여 얻은 이익금으로 1차 경공업을 육성시키고 2차로 중공업을 발전시켜 세상에서 하나뿐인 완전한 자립국가를 만들어 1980년까지는 모든 사람이 매일 휴식을 즐기게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계획은 구 소련의 ‘집단 농장제도’와 중국의 ‘대약진 운동’ 그리고 북한의 ‘주체사상’을 혼합한 공산혁명 정권의 야심찬 계획이었는데, 결국 환상으로 끝나고 말았다.


◇ 폴포트(Pol Pot : 1928~1998)는 누구인가?

 

 

 

캄보디아 공산혁명의 지도자 폴포트는 1928년 5월 25일 프놈펜 북부에서 90여 마일 떨어진 캄퐁 톰(Kompong Thom )주 프랙 스바우브(Prek Sbauv) 마을에서 양부모가 크메르족인 아버지 팬 살로쓰(Pen Saloth)와 어머니 속 넴(Sok Nen) 사이에서 9남매중 여덟번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부농으로 마을의 유지였고 어머니는 자비심이 많아 마을에선 많은 존경을 받았다. 그의 본래 이름은 살로쓰 사(Saloth Sar)이며, 폴포트 라는 이름은 공산혁명 이후 1976년 ‘민주 캄푸치아국’ 선포와 함께 만든 이름이다.


그의 어린시절은 왕궁에서 궁중직원과 무용수로 일하고 있는 형과 누나의 자취 집으로 옮겨 생활하다가 왕궁 근처에 있는 바트 보툼배디(Vat Botum Vaddi)라는 불교사원에 행자승으로 들어가 캄보디아 글과 불교 경전을 공부했다. 그는 초급 교육을 받던 시절에 또래 아이들과 잘 어울렸으며 다투거나 싸우는 일이 없는 얌전한 학생이었다고 한다. 그는 불교사원의 유치원 과정을 마치고 형의 학자금 지원으로 에껄미르(Ecol Miche)라는 프랑스계 초등학교에 들어가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기독교 교리를 접하며 정상교육을 받았다. 1942년에는 당시 캄보디아에서 세번째로 큰도시이며 경제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캄퐁참(Kampongcham)에 새로 개교한 노로돔시아누크 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신입생은 20명이었는데 이들은 각 주에서 선발되었고 살로쓰 사는 캄퐁톰의 대표였다. 여기에서 그들은 모두 프랑스어로 공부를 하였고 그는 여기에서 바이올린을 교습받기도 하였다.


그의 동창생 가운데 후님(Hu Nim)이 있었는데 후에 공산주의자가 되어 폴포트 정권의 공보부 장관을 지냈으며 한 학년 후배 였던 키우삼판(Khieu Sampan)은 프랑스 유학을 거쳐 폴포트 정권의 상징적 국가 원수를 지냈다. 그는 중간 정도의 학업 성적을 유지하였으나 선생의 강의에 충실하였으며 유쾌하고 올 곧고 예의 바른 학생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크반 시판 (Khvan Siphan)이라는 선생님이 앙코르 제국의 영화를 상기시키며 식민통치하의 연약한 조국의 현실을 토로할때 그로 부터 깊은 감명을 받고 후에 사립고등학교의 교사가 되기도 하였다.


1948년 그는 캄보디아 최고 명문 고등학교인 리씨 시소와쓰 (Lycee Sisowath)에 입학 시험을 보았으나 실패하고 기술 고등학교인 에꼴태 끄니끄 (Ecole Technigue)에 입학하여 수학하다가 다음 해 정부 장학생으로 파리 유학을 떠나게 된다. 1949년 9월말 그는 파리에 도착하여 싸뜨 대학(Cite Universitaire) 전파전기학과에 등록하였다. 1950년 여름방학을 맞아 인생의 전환점을 가져다 주는 중요한 경험을 하게 된다.


여름방학이 다가오자 그는 사회주의 써클 조직의 홍보에 매료되어 유고슬라비아를 위한 자원노력 봉사대에 참여하여 1개월 동안 유고슬라비아에서 노력 봉사활동을 벌였다. 그는 여기서 당시 유고슬라비아의 강력한 지도자 조시프 브로즈(Josip Broz)가 이끄는 전국민을 동원한 나라 복구 정책에 매료되게 된다. 후에 그는 프랑스 공산당원이 되어 학업은 점점 멀리하고 공산주의 사상에 몰두하게 된다. 그는 유고슬라비아에서 집단노동력의 힘을 느끼고, 20년이 지난 뒤 정권을 잡았을 때 전인민을 동원하여 식량증산운동을 벌였던 것으로 관측된다.


결국 살로쓰 사는 공산주의 사상에 깊숙이 빠져들면서 1952년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하였고, 학업 성적 불량으로 장학금이 취소되어 파리의 인도차이나 공산당클럽과 프랑스 공산당 사이를 배회하다가 1952년 12월 공산주의자가 되어 학위도 없이 캄보디아로 돌아왔다. 그는 1953년 8월 프랑스 식민 통치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는 인도차이나 공산당에 가입, 본격적인 캄보디아 공산당 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는 정치 학습을 마치고 프놈펜의 좌경단체와 협조하기 위해서 프놈펜에 돌아와 가명을 사용하며 활동하다가 1955년 총선이후 시아누크의 좌경 및 공산주의자 강경탄압으로 활동이 제한되자 프놈펜의 시립고등학교 참라온 비치아에서 교편을 잡았다. 1956년7월 그는 리씨 시소와쓰 고등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고 있던 키우포너리(Khieu Ponnary)와 결혼하고 교직에 충실하며 공산주의 지하 활동을 펴나갔다. 그는 학생들 사이에서 상당한 인기와 존경을 받았던 교사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960년데에 들어서면서 당시 공산당 서기장이던 ‘토우 사모스’가 시아누크 경찰에 의해 실종 되면서 살로스 사는 캄보디아 노동당 중앙 위원회 서기장이 되었다. 그는 이후 캄보디아 동부지대, 동북부 라타나기리(Ratanakiri)주, 캄퐁톰(Kompongtom)주 등 변방 시골 지역과 산악지대에 공산당 게릴라 본부를 설치하고 이동하면서 베트맹 공산당으로부터 무기와 군사훈련의 지원을 받아 크메르 공산당의 전투력을 증대시켜 1967년 시아누크 정부에 대해 무장투쟁 선언을 하였다. 1968년에는 캄보디아 서북부 바탐방주와 캄보디아 남동부 캄포트 지역 등 몇 개주를 장악하면서 프놈펜 정부를 계속해서 압박하였다.


 

1972년 미국과 베트맹의 파리 종전 협정으로 캄보디아 내 베트맹군이 철수하고 1973년 미국의 공산게릴라기지에 대한 대대적인 공중폭격으로 크메르 루즈 공산게릴라군은 잠시 주춤거렸으나 이후 베트남에 주둔했던 미국군이 철수하자 공격을 가속하여 마침내 1975년 4월17일 프놈펜에 입성하였다. 이후 그는 공산혁명 정권의 최고지도자, 큰형으로 캄보디아 현대사의 비극을 연출하였다. 3년7개월간의 통치기간중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만행을 그는 그의 민족에게 저질렀던 것이다.


◇ 크메르 루즈의 몰락과 폴포트의 최후

 

폴포트 정권의 주된 몰락 원인은 초기 베트남 령의 일부 도시를 점령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나중에 베트남군이 캄보디아를 침략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


1978년 12월 24일 베트남은 해군과 공군을 위시하여 10만 명의 군사로 캄보디아에 전면 공격을 개시 하였다. 베트남의 입장에선 전쟁이 행군이나 다를 바 없었다. 미군이 철수 하면서 남기고간 전투기를 비롯해 수 많은 첨단 장비로 무장한 베트남군을 상대하기는 캄보디아군은 허수아비나 마찬가지였다.

 

 

베트남군이 프놈펜에 당도하자 결사항전을 외쳤으나 그때는 이미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으며 그들의 환상 공산주의는 종말을 고하게 된다. 그들은 북부 산악 지대로 도피하며 간혹 게릴라전을 벌였지만 역부족이었고 폴포트는 자신이 만들어낸 비극에 대해 사과성명 한마디 발표하지 않고 1998년 태국 국경의 한 정글 지역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한때 캄보디아 전역을 살육의 광란으로 몰아 넣었던 크메르 루주의 지도자 폴 포트는 사라졌지만 캄보디아 사람들은 아직도 대학살의 악몽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인류사의 오욕으로 기록될 이러한 참극은 다시는 되풀이 되서는 안될 것이다.

 

 

출처

http://www.vietvet.co.kr

 

 

안내게시판에 있는 폴포트 사진

색 바랜 안내 게시판

재정비를 하였으면 좋으련만 ~

 

 

 

 

 

 

 

우리네 디딜 방아 여기도 있었네

 

 

 

 

 

 

 

상황버섯 판매장 쇼핑

 

 

 

캄보디아 북부지역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산림이 울창하고 크메르 루즈 군이 쫓기어들어가 게릴라 전을 펼쳐 피아 간에 지뢰를 매설하여 일반인은 접근이 안되고 군인들이  산뽕나무에서 상황버섯을 채취 하여 온다고 함

 

 

 

 

산뽕나무라고 하는데 내가 알고 있는 뽕나무와는 너무나 다르다

 

 

30년 이상된 상황버섯

100년 된 버섯도 있다고 하는데 믿기질 않는다

 

 

 

이녀석이 100년이라고 하였나 130년이라고 하였나 하여튼 귀한 놈이라고

유리 박스안에 보관하고 있었고 군인이 지키고 있었는데

설명을 듣고  나올때 보니 버섯도 없고 군인도 없다

 

 

 

하노이로 돌아갈 비행기 시간이 여유가 있다고 하여 박쥐 공원 (왕의 휴양지)로 이동

 

 

 

 

 

 

 

 

대낮인데도 나무 꼭대기 가지에 박쥐들이 대롱 대롱 매달려 있다

 

 

 

 

 

 

 

나무들이 울창 하게 자라고 하늘 높이 자라고 있다

 

 

 

 

 

 

 

 

왕의 휴양 공원 한바퀴 둘러보다

 

 

 

앞쪽에 보이는 건물이 왕이 내려오면 쉬는 처소 이며

평소에는 개방 하여 일반시민들이 휴식을 취하고 왕이 오면 통제를 한다고 함

 

 

 

 

 

 

 

 

 

 

 

 

왕의 처소 옆 사거리

 

 

공원 나무 그늘 벤취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시민들

 

 

 

여기는 사찰 인듯 한데 시민들이 참배를 하고 있다

 

 

 

향을 피우는 향로 가 엄청나다

 

 

 

 

 

 

 

 

야외 촬영

 

 

 

 

박쥐를 한번 더 올려다 보고 저녁식사 하러 이동

 

 

 

 

 

 

 

 

 

 

 

 

 

식사후 시내 야경 구경

선택관광이다

 

 

 

번화가에는 관광객들로 붐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