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으로가는길/백두대간 자료 모음

백두대간이란?

청계수 2009. 6. 10. 16:59


 

우리가 지켜야 할
조국의 산줄기
백두대간은
우리민족의
생명선이다.

민족의 얼
백두에서 지리까지
단 하나의 물길로도
끊기지 않고
우리네 땅
굳건히 지켜 온
우리민족의
척추다.

 

● 민족의 자랑스런 유산과 빼앗긴 산줄기

백두대간에는 우리 민족이 삶에서 터득한 경험과학이 녹아 있다.
우리나라는 국토의 약 65%가 산이다. 산은 국토를 바르게 이해하고 인식하는 데 큰 비중을 차지한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산과 매개되어진 문화와 전통을 꽃피우며 역사를 발전시켜 왔다.

한국의 대표적 종교인 불교는 산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불교와 더불어 모든 전통 종교도 산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으며, 우리의 삶 또한 시작은 다를지라도 끝은 산소(山所)라고 이름하는 산에서 맺음된다.
이렇듯 산은 우리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예술, 철학 등 전 영역에서 그 영향을 미쳤다.

우리 조상들은 산을 물줄기처럼 끊어지지 않는 맥으로 보았다. 산과 강이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공존하여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인식했다. 그리하여 산은 물을 낳고 물은 산을 가르지 않는다고 여겼다.
높은 봉우리가 서로 마주하고 있어도 그 사이에 물이 흐르면 산줄기는 서로 돌아가며, 평야 지역의 독립봉이나 야산에도 면면히 지맥이 흘러 바다까지 이어진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산줄기를 인식하는 기본 개념인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의 원리이다. 그리고 산자분수령의 원리에 입각해 우리 산줄기를 체계화 한 것이 바로 백두 대간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산줄기의 질서와 체계를 밝혀 놓은 것이다.
백두대간(白頭大幹)이란 우리 땅의 근골을 이루고 있는 산줄기로서,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산에 이르기까지 단 한번의 물줄기로도 끊이지 않고 이어진 산줄기를 말한다. 1400㎞에 달하는 백두대간은 백두산을 뿌리로 하여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한 개의 정간, 13개의 정맥으로 갈라진다. 마치 나무의 뿌리와 가지, 줄기가 펼쳐지는 것과 같다. 백두대간과 13개의 정맥들은 우리나라의 산줄기뿐만 아니라 물줄기(水界)를 구분짓는다. 대간에서 갈래 쳐 나온 산줄기는 모두 14개이다. 이것들은 열 개의 큰 강을 가늠하는 울타리들이다.

조선 후기까지 모든 지리의 인식의 중심은 백두산이었다. 우리나라 모든 산줄기는 백두산으로 연결되어 있다. 백두산의 의미는 민족의 시원(始原)과 관련해서도 특별하다. 단군 탄강(誕降) 설화로부터 시작해 언제나 높고 성스러운 산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조선 후기까지의 모든 고지도에 백두산은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백두산을 그 출발이자 뿌리로 삼고 있는 백두대간은 우리나라의 산줄기를 계통적으로 분류하고 물줄기를 갈라놓았을 뿐만 아니라, 조상들의 생활영역 모든 곳에서 규정력을 가졌다. 국방과 행정구역의 경계는 물론이고 기후 구조와 배산임수의 취락 구조, 지역마다의 독특한 주거 양식과 식생활 양식, 언어 문화와 관혼상제 등의 제례 양식까지도 백두대간에 의해 다르게 발전해 왔다.

● '태백산맥'에 담긴 일제 잔재

구한말 일제는 식민지 수탈을 위해 전 조선에 걸쳐 대대적인 광물 조사 작업을 벌였다. 이 작업의 결과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산줄기 개념인 '백두대간'이 태백산맥으로 바뀌었다.

문화 역사적 재부인 조선시대의 자연지리 인식체계인 백두대간은 일제시대 때 왜곡되기 시작해 점차 역사의 뒤꼍으로 묻혀 갔다. 현재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고 정부나 공공 기관에서 사용하는 태백산맥이니 소백산맥이니 하는 산맥 개념이 만들어진 것은 일본의 지질학자 고토분지로(小藤文次郞)에 의해서였다. 일본은 19세기 후반부터 우리나라의 지질조사를 감행했다. 이러한 조사의 일환으로 당시 동경제대 교수인 고토분지로는 1900년에서 1902년까지 약 14개월에 걸쳐 조선 전국의 지질조사 작업을 벌였다. 그 결과 1903년 동경대학교에 「조선의 산악론(An Orographic Sketch of Korea)」이라는 논문과 지질구조도를 발표하였다. 이 논문은 한반도의 지질 연구에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나, 그 궁극적인 목적은 한일합방 이후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던 지하자원 수탈을 비롯한 식민지 침탈을 위한 기초 조사였던 것이다.

고토분지로가 수행한 지질조사를 바탕으로 형성된 산맥 개념은 지질 구조선에 입각하여 암석의 기하학적인 형(形), 이것들의 삼차원적 배치의 층층을 기본 선으로 한 것이다. 다시 말해 땅 속의 암맥줄기를 산맥의 기본 개념으로 삼은 것이다. 이것은 실제의 지형에 존재하는 산의 흐름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산맥 개념은 풍부한 문화 역사적 터전이었던 산줄기를 지질학적 차원으로 단순화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백두대간은 90년대 초부터 산악인들을 중심으로 회자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전에 외롭게 고군분투한 고지도 연구가 이우형 선생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그 개념과 내용 전파가 시작된 바 있다. 이 때가 80년대 후반이다. 90년부터는 대학 산악부와 일반 산악회 등의 젊은 산악인들을 중심으로 백두대간 종주 등반이 붐을 이루었다. 백두대간의 종주에 불이 붙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남한 구간의 백두대간이 진부령에서 지리산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의 물길로도 끊기지 않고 계속 능선으로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백두대간은 이제 산악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도 서서히 퍼져가고 있다.

● 우리나라 자연 생태계의 보고 백두 대간

백두대간을 통해 우리는 산줄기 전체를 통틀어 사고하는 시야를 획득하게 되었다. 산줄기도 물줄기처럼 이어져 있다는 사실은 기존의 산맥 체계에서는 가질 수 없었던 인식의 전환이다.

백두대간은 철저하게 수계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반만년 농경 사회를 유지하면서 습득한 한민족의 자연경관에 대한 이해이다. 우리 조상들은 산을 단순히 자연과학적 대상으로 파악하지 않고 풍부한 인문적, 사회적 대상으로 파악했다. 또한 한 줄기로 연결된 백두대간은 한반도의 생태적 골간이 된다. 동·식물의 분포 및 이동 경로를 전체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백두대간의 남한 구간에는 강원도, 경상북도, 충청북도, 전라북도, 경상남도, 전라남도 등 6개 도와 12개 시, 18개 군 등이 망라되어 있다. 여기에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국립공원인 지리산과 설악산을 비롯하여 오대산, 소백산, 월악산, 속리산, 덕유산 등 7개의 국립공원이 포함된다. 도립공원으로는 태백산과 문경새재 등 2개가 있다.

이것으로서 백두대간이 산림생태의 핵심권역을 두루 포함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국토 전체의 자연 환경을 한 눈에 파악 할 수 있는 생태적 축이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백두대간과 아울러 나머지 정맥까지 살펴 보면 우리나라의 모든 산과 강을 조화로운 질서 속에서 파악 할 수 있다이제 백두대간은 잊혀진 옛 산줄기 이름이 아니라, 우리의 산과 자연을 옳게 이해하는 이정표로서 다시 움트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 대동여지도와 백두 대간

대동여지도는 동·서양을 포함한 당대의 어떤 지도나 지리지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성과물이다. 인공위성에 의한 제작 기법으로 만들어진 현재의 지도와 비교해 볼 때도 놀라울 정도의 정확성을 나타낸다. 그러나 일제는 그들의 조선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의 자연지리적 성과를 말살하였다. 이 과정에서 백두대간을 비롯한 자연지리, 문화·역사지리가 사라지거나 왜곡되어 갔다. 그 단적이 예가 풍수지리다. 풍수가 지녔던 과학성과 건강성은 사라지고 잡술이나 미신적 요소만이 남게 된 것이다. 국민학교에서 초등학교로 바뀌는 데 무려 50년이 걸렸다. 백두대간이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데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으나 반드시 되살려야 할 우리의 산줄기 개념인 것이다.





◎ 본 자료는 녹색연합에서 인용하였습니다.